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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이는 문화예술

호암 이병철, 삼성을 건설하고 사업보국을 실현하다

“이 회장께선 전경련 회장이었다. 젊은 기업인에게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강연 초안을 만들고, 다시 고치는 과정을 석 달 동안 하셨다. 원고가 완성되었는데도 아침마다 저를 불러서 읽으셨다. 


나중에 알았다.

사람을 앞에 두고 강연 연습을 하신 거 였다.

또 갑자기 ‘강연장에 가서 사진을 찍어오라’고 했다.

나중에 보니 강의장의 병풍과 내부 모습을 보고, 거기에 맞춰 양복 색깔을 고르셨다. 


그만큼 철저했다.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라’는 말이 있지만, ‘돌다리를 두드리고 건너는 사람을 보고 건너라’는 느낌이 들 만큼 일처리가 치밀하신 분이셨다.“ 


호암 이병철에 대해서 말하다


이병철(李秉喆, 1910년 2월 12일 ~ 1987년 11월 19일)은 대한민국의 기업인, 상인으로 제일제당과 삼성그룹의 창립자이다. 일본 와세다대학교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했다가 1934년 중퇴하였다. 이후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세워 사업을 하다가 1938년 자본금 3만원으로 삼성그룹의 모체인 삼성상회를 설립했다. 1951년부터는 삼성물산을, 1953년에는 CJ그룹의 모태가 된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했고, 수출을 통해 제조업을 확장하여 삼성중공업, 삼성물산, 삼성석유화학 등 삼성그룹의 기반을 닦아놓았다.


1964년 5월 동양 라디오와 텔레비전 동양방송과 1965년 9월 중앙일보를 창설하여 방송사와 언론사에도 진출하였다. 그러나 중앙일보 등은 사돈인 홍진기 일가에게 넘겼다. 그 뒤 순수 기업 활동에 전념, 1969년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설립하여 전자제품의 수출에 성공을 거두어 삼성그룹 육성의 기반의 마련하였다.1974년 삼성석유화학·삼성중공업을 설립하여 중화학공업에 진출하였고, 이후 용인자연농원·삼성정밀 등을 설립하였다. 


그밖에 삼성미술재단을 세워 미술인을 후원하였고, 용인 자연농원(에버랜드의 전신)을 세우기도 했다. 경남 의령 출신으로 호는 호암(湖巖)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삼성을 세우다


삼성상회를 설립하기 전, 호암 이병철 회장은 사업구상을 위해 수개월에 거친 여행길에 올랐다. 국내 여러 도시와 만주, 북경, 상해 등지를 돌아본 끝에 소자본으로도 승부를 걸 수 있는 무역업을 선택하고 1938년 3월 1일. 대구 상업활동의 중심지였던 서문시장 한 편에 ‘주식회사 삼성상회’라는 간판을 걸었다.


당시 대구 서문시장은 경부선 철도와 여러 국도를 통해 북쪽으로는 안동-의성-김천-상주, 남쪽으로는 현풍-고령, 서쪽으로는 성주까지 연결되어 각종 생필품과 농수산물, 포목, 가축 등이 활발히 거래되는 상업의 중심지였다. 광복 후 삼성물산공사로 발전하여 서울로 근거지를 옮길 때 까지 약 9년간 삼성상회는 서문시장의 입지조건을 바탕으로 기반을 다졌다.


삼성 창업자인 호암 이병철 회장은 크고, 많고, 강하며, 완전한 존재를 나타내는 숫자 삼(三)에 밝고, 높고, 깨끗이, 그리고 영원히 빛나는 의미인 성(星)을 합쳐 ‘삼성’이라 하고, 여기에 “크고, 강하고, 영원하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삼성의 이름에 자신의 염원을 가득 담은 것이다.




사업으로 나라에 이바지 하자, '사업보국'의 꿈


1945년 광복 직후, 호암은 이곳 삼성상회에서 기업가의 임무를 새롭게 깨달으며, 삼성의 경영이념인 ‘사업보국(事業報國)’ 정신을 확고히 세웠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행히 나는 기업을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왔고, 나의 갈 길이 사업보국에 있다는 신념에 흔들림이 없다.” - 호암 이병철, ‘나의 경영론’에서 


나라가 강해지려면 국민의 살림살이가 풍요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한 호암은 대한민국을 무슨 일이 있어도 풍족하고 강한 독립국가로 키워야겠다고 생각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의 해에 태어나 성장한 호암은 그의 신념대로 전 생애에 걸쳐 사업을 통한 조국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호암의 삶 


호암은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전쟁부터 4.19혁명, 5.16군사쿠데타, 12.12사태까지 격동과 갈등의 역사를 온몸으로 이겨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부정축재자로 몰린 것도 모자라 마침내는 밀수범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썼다.


1960년대 군사정부의 '경제 제일주의'에 힘입어 이병철의 사업은 더욱 번창했지만, 다시 한 번 큰 좌절을 맛보게 된다. 바로 '한비 사건'이다.


삼성이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내놓은 평전인 '담담여수(淡淡如水)'는 이 사건을 '파란 많았던 호암의 생애에서 더할 나위 없는 쓰디쓴 체험'이라고 적고 있다.


이병철은 ‘좌절을 겪어야 큰 그릇이 된다’고 말하곤 했다. 평생 사업을 하면서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던 호암은 ‘일이 잘 되어나갈 때는 오히려 다가올 불행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체득했던 것이다. 


“떫은 감도 정성스레 잘만 말리면 단감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급히 서두르거나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감은 달게 되지 않는다. 이렇게 떫은 감을 달게 만들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업가에게는 항상 지난날에 겪은 일들을 돌이켜보는 마음이 필요하다. 이런 마음가짐이 없으면 아무리 많은 경험을 쌓는다 하더라도 살이 되고 피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가 강조했던 ‘단감론’이다. 기쁨 뒤에 반드시 슬픔이 따르는 경우를 많이 겪어봤던 터라 항상 다음에 닥칠 불행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지난 불행을 잊지 않고 거울삼는 것이 오늘의 행복에 도취되는 것보다 몇 배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50대의 꿈이 담겨 있는 한비 공장은 완성을 바로 앞두고, 호암의 손에서 멀어져 갔다. 10년간 가져온 그의 꿈은 사라져 버렸다. 이병철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당시를 떠올렸다. “천리의 둑도 개미구멍 하나로 무너진다. 비운의 한비공장은 물론이거니와, 오랜 세월에 걸쳐 각고 끝에 쌓아 올린 사업가로서의 업적도 모두 허사가 되고 마는 것일까.”


이병철은 이렇게 자신을 위안을 삼았다. “10년에 걸쳐서 세 번씩이나 도전해 겨우 완성시킨 한비공장이다. 손을 데는데 아무런 감상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틀림없는 보람과 기쁨이 있었다. 국가가 시급하게 필요로 하는 세계 최대의 비료공장을 내 손으로 완성시켰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