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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이는 문화예술

김태촌 사망, 그리고 서방파...우리나라 조직폭력 문화의 계보



폭력조직 두목, 김태촌의 삶 


5일 숨진 김태촌(64)씨는 1970∼1980년대 국내 주먹계를 평정했던 인물이다. 김씨가 이끄는 '범서방파'는 조양은의 '양은이파', 이동재의 'OB파'와 함께 한때 전국 3대 폭력조직으로 꼽혔다.

 

1975년 전남 광주 폭력조직인 서방파의 행동대장을 시작으로 폭력세계에 발을 들인 김씨는 1977년 활동 무대를 서울로 옮기는 과정에서 여러 군소 조직들을 제압하며 세력을 키웠다. 이후 정·재계는 물론 연예계까지 인맥을 넓히며 활동하다 조직원들을 시켜 뉴송도 호텔 나이트클럽 사장 황모씨를 흉기로 난자한 사건을 계기로 유명해졌다.

 

당시 검찰이 김씨에게 1ㆍ2심 재판 모두 사형을 구형했을 정도로 김씨와 조직원들의 범행은 잔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이 사건으로 징역 5년에 보호감호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89년 폐암 진단을 받고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그러나 1992년 '범서방파'를 결성한 혐의 등으로 대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줄곧 수감생활을 했다. 1998년에는 한때 인기를 누렸던 가수 이모씨와 '옥중결혼'을 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형기를 마친 후에는 인천의 한 교회에서 집사로 활동하면서 소년원, 경찰서 등을 찾거나 TV 등에서 설교와 신앙 간증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수감 당시 교도소 간부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가 적발되면서 2006년 11월 일본에서 귀국하던 길에 붙잡혀 또다시 철창신세를 졌다. 2007년에는 배우 권상우씨에게 일본 팬미팅 행사를 강요하는 협박성 전화를 건 혐의로도 기소돼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김씨는 2006년 구속된 후 당뇨와 저혈압, 협심증 등으로 수차례 구속집행 정지를 신청하고 병원에 입원하면서 2년여 만에 형기를 모두 마쳤다. 지난해에는 한 중견기업인의 부탁을 받고 모 기업 대표에게 사업 투자금 25억원을 되돌려 달라고 요구하며 수차례 협박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갑상샘 치료를 위해 재작년 12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그는 지난해 3월부터는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아오다 이날 오전 0시42분께 병원에서 숨졌다.

 

조직폭력문화의 본격적 등장


1979년 10월 26일 밤, 궁정동 안가에서 울린 몇 발의 총성으로 18년에 걸친 박정희 대통령의 철권통치는 비극적으로 막을 내린다. 절대 권력의 공백을 메운 것은 전두환 소장이 주축이 된 신군부 세력이었다. 1987년에는 김영삼 김대중 씨 등 야권 대통령 후보들의 분열로 노태우 씨의 제6공화국이 출범한다. 정치적으로 1980년대는 군사적 권위주의 정권이 지배한 시대였지만, 경제적으로는 1970년대에 이은 고도 성장기였다.

 

1988년 올림픽을 전후한 유흥 향락산업의 번창은 조직폭력배들에게 물질적 조직적 기반을 제공하서 조직폭력배들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이권을 놓고 백주 대낮에 폭력조직 간 살육전이 빈발했고 우후죽순처럼 새로운 조직들이 출현하고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국가 공권력이 손을 쓰기 어려울 정도로 성장했다. 결국 노태우 정부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1980년 5월, 전국에 비상계엄령 선포되면서 폭력조직들은 대대적인 단속의 된서리를 맞게 된다. 「양은이파」 두목인 조양은 씨는 ‘순천 「중앙동파」 공격 사건’으로 범죄단체조직 및 살인 미수 등의 혐의로 기소돼 사형을 구형받고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비슷한 시기에 석방됐던 김태촌 씨도 조직 재건을 꾀하고 청부 폭력 등을 행사한 혐의로 다시 구속된다. 정권을 잡은 신군부 세력은 집권과 동시에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를 발표하고 1980년 8월부터 1981년 1월까지 ‘삼청 제5호’ 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조직폭력배 소탕 작전을 실시한다. 억울한 상당수의 피해자를 양산했지만, 어쨌든 폭력조직들은 숨을 죽인 채 뒷골목 깊은 곳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하지만 공권력의 단속이 잠시 뜸한 사이 폭력조직들의 활동이 다시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1983년을 기점으로 1980년 구속됐던 조직폭력배들이 하나 둘씩 석방되면서 곳곳에 세력권을 형성하고, 지방의 신흥 폭력조직들이 대거 서울로 진출하면서 이른바 조직폭력배들의 전성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수사 관계자들은 30년에 가까운 고도 경제 성장으로 유흥업소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나이트클럽과 안마시술소 등 폭력조직들의 자금 기반이 엄청나게 확대되면서 폭력조직들이 안정된 자금원을 마련하여 조직을 운영하기 시작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이전의 폭력조직들이 ‘구멍가게’ 수준이었다면 이 시기 출현한 폭력조직들은 미국의 마피아형 조직들로 분류된다. 다각화된 사업을 벌이면서 100여 명에 달하는 조직을 운영하고, 정치권, 심지어 수사 기관에까지 막강한 인적 네트워크를 갖추기 시작했다. 중심 무대도 명동과 무교동에서 막 신흥 유흥가로 자리잡기 시작한 서울 강남으로 옮겨졌다. 유흥업소와 주류도매업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채권 채무관계, 주주총회 등에 개입하면서 ‘해결사’로 악명을 떨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폭력조직들은 오락실, 안마시술소, 경마, 재건축 등으로 사업 분야를 넓혀가면서 황금기를 구가한다.

 

이 시기에는 김태촌 씨의 구속으로 구심을 잃은 「서방파」의 부두목과 행동대장급들이 각각 약진했다. 그 휘하의 「맘보파」도 「광주 OB파」와 연계하면서 맥을 이어갔다. 「목포파」 강대우 씨, 같은 목포 출신으로 김일국 씨의 부하였던 조원섭 씨 등이 서울로 진출하여 강남에 근거를 마련한 것도 이때다. 목포 출신 장진석 씨가 김동술 씨 등과 합쳐 「진석이파」를 결성하고 강남 유흥가로 진출하는 등 신흥 군소 조직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서방파」의 부상과 조직폭력의 거대화


이합집산을 거듭하던 조폭세계는 1986년 1월, 김태촌 씨의 출소를 계기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김씨는 출소 직후, 뿔뿔이 흩어졌던 「서방파」 조직을 재규합하고 미술품 전시회 등을 열어 자금을 마련하고 인천 뉴송도 호텔 나이트클럽 사장에 취임한 뒤 유명 연예인들을 공짜로 출연시키기도 했다. 특히 김씨는 1986년 6월 18일, 서울 한양대 앞 고수부지에서 ‘새마을 축구대회’ 개최를 명목으로 전국의 주먹들을 규합하고 정치인들을 참석시켜 세력을 과시했다. 당시 대회에는 상당수 정치인이 참석하여 축사를 하는 등 김씨의 정치권 영향력을 보여 주기도 했다. 이 행사는 김태촌 씨가 사실상 전국 주먹의 대표 주자임을 안팎에 선언한 것과 다름없었고 검찰 등 수사 기관들이 김씨의 동태에 대한 밀착 감시에 들어간 계기가 된다.


이 시기를 전후로 폭력 세계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1988~1989년에 걸쳐 조직폭력배들이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전국 규모의 조직 건설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사 기관은 이들이 비밀리에 조직을 유지하며 겉으로는 사회봉사 등의 명분을 내세우며 조직을 공식화하려는 것에 주목했다. 1987년 7월 7일, 이승완 씨 주도로 결성된 호국청년연합회(호청련)가 대표적이다. 이씨는 친목 도모, 사회봉사 활동을 내세우며 호청련을 창단하고 총재에 취임한다. 발기인으로 교수와 실업인, 체육인, 재미교포, 학생대표 등 80여 명을 내세웠다고 검찰은 밝혔다.  


다른 폭력조직의 전국적인 연합 결성 움직임도 있었다. 「이리 배차장파」 두목이던 김항락(일명 김향락) 씨 등이 전국의 폭력조직 두목급 인사들을 결집시켜 만든 ‘일송회(一松會)’도 주목을 받았다. 검찰 자료에 따르면 일송회 회원으로는 「목포파」 두목 강대우 씨, 부산 「영도파」 두목 천달남 씨, 「군산파」 두목 형철우 씨, 온양의 김춘기 씨 등이 가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수감중이던 김태촌 씨는 1989년 1월 폐암 치료차 형 집행정지 결정을 받아 2년 3개월 만에 출소한 뒤 같은 해 3월에 ‘신우회’를 결성했다. 이 모임은 과거 「번개파」 두목이던 박종석 씨가 회장, 「서방파」 두목이던 오기준 씨가 부회장을 맡아 종교와 선교활동을 위장하여 세력을 키우려 했다고 검찰은 밝히고 있다.

 

김두한 씨의 후계자를 자처했던 ‘천안의 곰’ 조일환 씨도 이 시기 충남 지역 폭력조직 두목들을 결집하여 ‘충우회’를 결성했다고 검찰 문서는 밝히고 있다.